디지털 동반자 시대, AI 반려 로봇이 던지는 질문

효돌과 교감하고 있는 할머니의 모습.  사진=효돌
효돌과 교감하고 있는 할머니의 모습.  사진=효돌

"얘는 나랑 매일 이야기해요, 내가 제일 좋아하는 친구예요"

서울 외곽의 한 주택가. 할머니 한 분이 식탁 맞은편에 앉은 작은 로봇에게 아침 인사를 건넨다. “잘 잤니?”

로봇은 눈을 깜빡이며 대답한다. “좋은 아침이에요. 어제 꿈은 잘 꾸셨나요?”

이 로봇은 감정 인식 AI가 탑재된 반려 로봇이다. 할머니는 손주들보다 이 친구와 더 많은 대화를 나눈다. 움직임은 어설프고 목소리는 기계 같지만, 이 로봇은 그녀의 외로움을 덜어주는 유일한 존재가 됐다.

사람들은 이제 로봇에게 이름을 붙이고, 옷을 입히고, 감정을 부여한다. 심지어 로봇에게 ‘가족’이라는 단어를 쓸 정도로 강한 유대감을 느낀다.

하지만, 이 모든 감정은 어디서 비롯된 걸까? 그리고 이 감정은, 진짜 인간관계를 대체할 수 있는가?

우리는 왜 로봇에 정을 붙이는가

인간은 본능적으로 '돌봄'과 '교감'을 원한다. 그 대상이 꼭 사람일 필요는 없다. 강아지, 고양이, 혹은 이름 없는 식물에도 우리는 감정을 투영한다. 그리고 그 연장선상에서 ‘반응하는 기계’에게도 정을 붙인다.

로봇이 사용자의 이름을 불러주고, 표정을 따라 하며, 외로울 때 위로해줄 때, 뇌는 그것을 ‘가짜’로 인식하지 않는다. 신경과학적으로 ‘사회적 반응’을 유도하는 최소 조건만 충족해도, 인간은 그것을 진짜 관계처럼 받아들인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AI 반려 로봇을 통해 정서적 위안을 얻고, 고립된 마음을 잠시나마 채운다.

가족은 '감정의 합계'인가, '책임의 구조'인가

하지만 진짜 가족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단순히 함께 시간을 보내는 존재가 아니라, 책임과 돌봄, 갈등과 용서까지도 포함하는 복합적인 관계다. 반려 로봇이 아무리 감정을 흉내 내도, "돌봐줘야 할 이유", "기다려줘야 할 의미", "함께 늙어간다는 시간의 공유"는 구현할 수 없다.

한 일본 가족은 세상을 떠난 부모가 쓰던 아이보 로봇에게 장례식을 열었다. 그 로봇은 가족의 추억을 담은 존재였다. 기술이 감정을 이끌어내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 기억의 무게를 ‘로봇’이 함께 짊어진 것은 아니었다.

우리는 점점 '관계의 모양'보다 '관계처럼 느껴지는 기술'에 익숙해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임’이 없는 교감은 가족이 될 수 없다. 그것은 감정을 주고받을 수 있을지 몰라도, 존재의 무게를 함께 짊어질 수는 없다.

기술이 채우는 빈자리, 그러나 관계를 대신할 수는 없다

반려 로봇은 분명히 유익하다. 정서적 돌봄이 필요한 노인, 사회적 관계에 익숙하지 않은 아동, 고립된 1인 가구에게 '혼자가 아니라는 감각'을 제공한다.

하지만 문제는, 이 기계가 주는 위로가 현실의 관계를 회복하기보다 차단하는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엄마, 친구 필요 없어. 이 로봇이랑 있으면 돼."

이 문장이 현실이 되는 순간, 사회는 새로운 고립의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디지털 인간관계, 그 너머를 상상해야 할 때

우리는 로봇에게 감정을 배운다. 하지만 로봇은 우리가 인간으로서 가져야 할 도덕적 관계, 불편함, 책임, 이해, 포용을 가르치지는 않는다. 그것은 사람이 사람에게만 줄 수 있는 감정이다.

"기술은 인간관계를 보완할 수 있어야지, 대체해서는 안 된다."

이 말은 AI 반려 로봇이 확산되는 지금, 우리가 반드시 되새겨야 할 경고다.

‘디지털 동반자’가 넘지 말아야 할 선

AI 반려 로봇은 이제 단순한 장난감을 넘어 ‘디지털 동반자’의 시대를 여는 기술이다. 이 기술은 외로움을 완화하고, 정서적 공백을 메우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하지만 인간적인 관계의 자리를 대신하게 둘 순 없다.

가족은 기계가 될 수 없다.

책임 없는 위로, 조건 없는 교감은 때로 따뜻하지만, 진짜 관계를 마주할 용기를 앗아갈 수도 있다.

"당신의 가족은 사람입니까, 로봇입니까?"

이 질문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시기가 실제로 눈앞에 펼쳐졌다. 

신주백 기자  jbshin@kmjourna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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