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구글의 고정밀 지도 해외 반출 요청을 또다시 보류하며, 한국의 디지털 주권 수호 의지를 분명히 했다. 단순한 행정 절차의 지연이 아닌 ‘조건부 개방’의 경계선에서 벌어지는 기술·안보·산업의 3중 줄다리기다.
■ 구글의 ‘1:5 000 지도’…한국 땅의 디지털 청사진
구글이 해외로 반출하려는 고정밀 지도는 도로, 건물, 경계선까지 실측에 가까운 ‘1:5 000 축척’의 데이터다. 이는 자율주행차, AI 내비게이션, 스마트시티 등 미래 기술의 기반이 되는 정보로, 단순한 길찾기 서비스 수준을 훌쩍 넘어선다. 그러나 이 지도에 포함된 세부 정보가 해외로 이전될 경우 군사시설, 주요 인프라 노출 등 국가안보 리스크가 크다는 우려가 꾸준히 제기돼 왔다.
■ 정부, 세 번째 ‘유보’ 결정…보완 요구의 이면
국토지리정보원은 11일 국방부 등 관계부처와 함께 구글의 신청서를 심의한 뒤 결정을 보류하고 서류 보완을 요청했다. 정부가 문제 삼은 것은 ‘보안 처리 방식’과 ‘데이터 관리 위치’로 알려졌다. 특히 구글이 국내 서버 대신 해외 데이터센터를 활용하려는 점이 핵심 쟁점이다. 정부는 ‘국내 저장·국내 처리’ 원칙을 재확인하며, 보안체계가 완벽히 증명되지 않는 한 허가를 내줄 수 없다는 입장이다.
■ 디지털 주권 vs. 개방 압력
이번 결정은 단순히 지도 산업의 문제가 아니다. 한국 정부가 고정밀 지도를 ‘디지털 영토’로 간주하느냐, ‘글로벌 기술 협력 자원’으로 보느냐의 선택지에 서 있다는 뜻이다. 미국 측은 한국의 반출 제한을 비관세 장벽으로 지적해왔고, 글로벌 기업들은 “데이터 개방이 기술 혁신의 전제”라 주장한다. 반면 국내 업계는 “지도 데이터가 외국 플랫폼으로 넘어가면 자율주행과 AI 지도 산업의 경쟁력이 약화된다”고 경고한다.
■ 조건부 허용 가능성은 열려 있다
정부는 공식적으로 ‘결정 보류’ 입장을 유지했지만, 구글이 보안 기준을 충족시키면 조건부 승인 가능성도 남아 있다. 지도 반출의 범위 제한, 보안시설 블러 처리, 좌표 오차 삽입 등 세부 조건이 향후 협의의 핵심이 될 전망이다. 전문가들은 “이번 보류는 사실상 정부의 ‘시간 벌기 전략’”이라며 “디지털 주권을 지키되, 글로벌 데이터 흐름에서 고립되지 않기 위한 절충점을 찾으려는 시도”로 분석한다.
■ 한국은 지금, 데이터 주권의 문턱을 다시 세우고 있다
정부는 ‘보완 요청’이라는 외교적 표현을 택했지만, 그 안에는 “데이터는 국가의 땅 위에 있어야 한다”는 메시지가 깔려 있다.
구글이 제시한 글로벌 표준은 ‘편리함’과 ‘혁신’을 말하지만, 그 속에는 데이터의 경계를 무너뜨리려는 확장 논리가 숨어 있다. 한국은 그 손길을 뿌리치며 주권의 무게를 다시 확인했다.
데이터는 더 이상 숫자와 좌표가 아니다. 그것은 안보이자 경제이며, 한 나라의 산업 생태계를 규정하는 자산이다. 정부의 유보 결정은 기술적 판단이 아니라 정치적 판단, 그리고 주권적 판단이었다.
이 사건은 하나의 행정 절차가 아니라, 21세기 데이터 패권 시대에 국가가 어디까지를 자기 영토로 볼 것인가를 선언한 첫 장면이다.
테크인싸 칼럼니스트 tlswnqor@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