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가 각본을 쓴 영화 시사회에서 나오는 길이었다. 오랜만의 외출에 쌀쌀한 날씨와 삼성역 근처의 소음은 적응이 되질 않았다. 나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발끝만 보며 무작정 걸었다. 앞으로 뭘 먹고 살아야 하나. 고민의 발걸음이 쭉쭉 뻗어 나갈 때쯤. 순간적으로 주변이 함성으로 들썩였다. 고개를 들어보니 사람들이 삼각대를 세우고 한 방향만 찍고 있었다. 눈앞에선 엔비디아 CEO 젠슨 황과 삼성전자 이재용 회장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집에 와 뉴스를 보니 그날이 바로 ‘깐부치킨 회동’이라 불리던 날이었다.
내 눈길을 더 끈 건 그다음이었다. 사람들이 깐부치킨에서 젠슨 황이 앉았던 자리에 앉으려고 줄을 섰다는 뉴스였다. 사람들은 그 자리에 ‘부의 기운’이 남아 있다고 믿었다. 미래를 말하는 CEO들의 최첨단 대화가 ‘기운’이라는 미신으로 여운을 남기다니. 참으로 아이러니하고 재밌는 일이었다. 나도 가끔 아내 몰래 옷을 사고 들킬 때면 아내에게서 살기를 느끼곤 하는데. 정말 그런 ‘기운’이 있긴 한 걸까. 궁금해졌다.
기운 실험
1998년 기운과 관련하여 JAMA(미국 의사협회 저널, The Journal of the American Medical Association)에 실린 연구가 있다. ‘치료적 터치(Therapeutic Touch)’라는 오직 사람의 에너지(기운)로 손을 대지 않고 통증을 치료할 수 있다고 말하는 21명이 참가했다. 연구진은 실험자들에게 가림막을 세워 어느 손을 내밀었는지 맞히게 했고, 동일한 절차를 여러 번 반복해 실제로 ‘기운’을 감지할 수 있는지를 검증했다. 만약 몸 주변의 에너지를 느낄 수 있다면 높은 정답률이 나와야 한다. 결과는 평균 44%. 동전 던지기와 다르지 않았다. 요컨대, 인간이 물리적 ‘기운’을 감지할 수 있다는 주장은 이 조건에서 확인되지 않았다.
무의미의 의미
그렇다면 추운 날 줄을 서서 젠슨 황의 자리에 앉으려는 일은 무의미한 걸까. 꼭 그렇진 않다. 과학적 근거가 없더라도, 당장 흔들리는 마음에는 작은 의식과 믿음이 약이 될 때가 있다. 불경기 속에서 그 자리에 앉아 치킨 한 마리를 뜯으며 오늘 산 로또가 될지도 모른다는 짧은 상상, 우리도 젠슨 황처럼 잘 풀릴 수 있다는 믿음. 이런 일종의 의식 같은 수다는 마음을 추스르고, 내일을 버틸 수 있게 만든다. 결국에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이성이 아닌 마음이니까. 누가 뭐래도 아무것도 아닌 것을 믿고 의미를 만들어내는 일. 그것이야말로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고유한 행동이 아닐까.
그래서 오늘은 집에서 깐부치킨을 주문하련다. 경기도민이라 젠슨 황 자리에 앉진 못해도 따뜻한 치킨에 기대어 내일을 버틸 작은 희망을 품겠다. 치킨을 앞에 두고 조용히 젠슨 황 형님께 빌어본다. 아내와 나, 그리고 사랑하는 우리 아들이 건강하기를. 우리 밥벌이도 조금은 넉넉해지기를.
주재훈 인스타그램 gibon.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