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로 답을 내는 대학생들
서울대학교에서 AI를 이용한 커닝 소식이 터지자 캠퍼스가 술렁였다. 연세대, 고려대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고 한다. ‘요즘 대학생은 AI가 없으면 마약중독자처럼 손을 벌벌 떤다’라는 농담까지 들린다. 한편으론 신기했고, 한편으론 말문이 막혔다. 내가 대학에 다닐 때 AI가 있었다면 그 유혹에서 벗어나기 쉬웠을까. 자신 없다. 대학 공부도 성실히 하지 않았기에 그들을 함부로 비난하기 어렵다. 나는 전공보다 영화와 책에 더 매달리던 사람이었으니까. 이제는 전공 지식도, 그때 읽은 책과 영화도 모든 것이 흐릿하다. 그럼에도 이상하게 한 과목만은 선명하다. 타이포그래피 수업이었다.
타이포그래피
나는 언론정보학과였지만 디자인 융합을 복수전공했다. 디자인에 문외한이던 내가 그 수업을 들은 건 딱 한 가지 이유였다. 스티브 잡스가 대학에서 타이포그래피를 듣고 큰 영향을 받았다는 이야기에 마음이 움직였다. 수업 방식은 단순했다. 교수의 짧은 이론 강의가 끝나면 바로 과제가 떨어졌다. 그날 배운 개념을 붙들고, 그 자리에서 형태로 답해야 했다. 내가 받은 주제는 윤동주 시인의 시, 산울림의 느낌을 ‘오직 글자’로 표현하는 일이었다. 이미지나 사진은 금지였다. 시에 담긴 글자 자체로 감정과 질감을 만들어야 했다.
그때부터 머릿속에 하나의 물음이 떠올랐다. ‘질감이란 대체 무엇이지?’ 글자를 읽을 줄만 알았지, 글자로 감각을 만든다는 건 나에게 낯선 일이었다. 획을 두껍게도 해보고 자간을 무자비하게 벌려보기도 했다. 하지만 종이 위의 글자는 어떠한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다른 학생들보다 오래 헤맸고 결과물도 초라했다. 그래도 질문을 바꾸지 않았다. ‘질감이 눈으로도 느낄 수 있는 촉감이라면, 산울림은 어떤 질감일까?’ 수십 번 시행착오 끝에 내 답은 ‘부서짐’이었다. 바삭하게 부서진 과자 부스러기 같은 글자로 표현한다면, 소리가 울려 퍼져서 멀리 흩어지는 산울림의 고독한 느낌을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시에 있는 낱말들을 이리저리 만져가며 나름대로 부서지는 질감을 표현했다. 매번 나의 작업물에 의문을 가지던 교수님도 조금씩 인정을 해주셨다. 완벽하진 않았지만, 내 눈으로 얻은 작은 답이었다.
대학은 질문하는 곳
내가 그 수업에서 배운 건 기술이 아니다. 눈으로 판단하는 법이었다. 규칙은 참고일 뿐, 글자와 문장들 사이에서 왜 이 두께인가, 왜 이 간격인가, 왜 이 실패를 버리고 저 실패를 남겼는가 고민했다. 교수는 결과보다 과정을 물었다. 수많은 질문과 실패는 나만의 기준을 만들었다. 과제는 ‘정답 제출’이 아니라 ‘질문 일지’에 가까웠다. 그때 처음 알았다. 대학 공부의 핵심은 정답을 맞히는 능력이 아니라 질문을 세우고 근거를 만드는 힘이라는 것을.
AI 커닝 뉴스 앞에서 내가 가장 걱정한 지점도 그거였다. AI는 이제 인간보다 더 빨리 지식을 찾고 답할 수 있다. 하지만 그건 대개 이미 있는 규칙과 정보를 적용하는 일이다. 물론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지식을 평가하는 시험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대학이 AI가 해낼 수 있는 결과물만 평가하면 AI 사용에 대한 유혹은 커지고 배움은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학생이 만들어낸 질문을 평가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왜 이 질문이 필요했는지, 어떤 가설을 세웠고, 이 가설을 뒷받침하는 힘은 무엇인지. 이런 걸 묻기 시작하면 남이 만들어 준 답으로는 버틸 수 없다. 스스로 생각해야만 통과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단순히 학생을 ‘정답 기계’가 아니라 ‘질문 생산자’로 대하는 대학의 새로운 시각이 필요하지 않을까.
감히 스스로 생각하라
나는 지금도 내 서랍 어딘가에 그때의 조악한 시안을 가지고 있다. 잘 만든 작품은 아니지만 분명 나만의 기준으로 올린 답이었다. 졸업하고 오래 지나도 그 과목만은 잊히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누군가의 정답이 아니라, 내 질문으로 얻은 조각이었기 때문이다. 그 수업에서 내가 배운 건 결국 한 가지였다. ‘감히 스스로 생각해 보려는 작은 용기.’ 이 소란스러운 뉴스들 앞에서 나는 그 한 가지만 조용히 되새긴다. 정해진 답보다 먼저, 내 질문을 꺼내 보려는 작은 용기. 그 용기가 우리에게 필요하다.
주재훈 인스타그램 gibon.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