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으로부터 해방된 인간은 즐거웠다. 처음에는 그랬다. 『소설 - 영수와 0수 中』
바이러스와 인공지능이 세상을 갈아엎고, 사람들은 노동에서 해방된다. 사람들은 자유를 만끽하지만, 곧 우울해진다. 자살이 늘자 정부는 정신 건강을 이유로 강제 근무제를 도입한다. 소설 『영수와 0수』의 핵심 설정이다. 단순하지만 오래 남는다. 왜 그토록 지겨워하던 노동에서 풀려났는데도 우울해질까.
나도 요즘 일을 쉬고 있다. 이제 막 40일을 지난 아들을 키운다는 이유로 집에 있다. 뭐 딱히 불러주는 곳이 있는 건 아니지만, 일을 하지 않으니 왠지 우울한 느낌이 든다. 흔히 말하는 산후우울증이 온 것인가. 내가 아들을 낳은 것도 아닌데. 육아하는 아내가 더 힘이 들 텐데, 같이 있는 내가 더 유난 떠는 것 같아 부끄럽다. 몇 달 전만 해도 “일하기 싫어 죽겠다”였는데, 막상 일이 없어 우울하다니. 사람이 원래 이렇게 간사한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가. 이 우울은 어디에서 오나.
존재가 본질에 앞선다
사르트르는 말한다. “존재가 본질에 앞선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본질을 지닌 채 태어나지 않는다. 인간은 세상에 먼저 던져지고, 그 안에서 자신이 내리는 선택들과 책임을 통해 자기를 만들어간다. 즉, 인간은 이미 주어진 목적이나 이유를 따라 사는 존재가 아니라, 자신의 선택과 행위를 통해 본질을 만들어가는 존재다. 그런데 우리는 흔히 자신을 설명할 때 직업을 덧붙인다. 나는 영화감독이다. 공무원이다. 삼성맨이다 등. 직업 하나로 생활 방식과 가치관, 사회적 위치까지 어느 정도 짐작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직업은 나를 설명해 주는 가장 간단한 언어가 된다. 하지만 그 편리함 속에서 우리는 쉽게 착각한다. 마치 직업이 곧 나 자신인 것처럼. 이러한 착각은 '이 일을 왜 하고, 나는 어떤 인간이 되고자 하는가'를 망각하게 만든다. 사르트르는 이런 태도를 자기기만(mauvaise foi)이라 불렀다.
AI가 노동을 대신하는 순간, 직업을 자신의 본질로 여겼던 사람들은 불안해진다. 더 이상 무엇으로 나를 설명해야 하나. 나의 존재 이유는 무엇인가. 대부분의 시간을 노동으로 채워왔던 우리는 이제 무슨 일을 하느냐가 아니라, 어떤 인간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묻는 시대로 내던져진다. 이제 누구도 대신 우리를 규정해 주지 않는다. 필요한 것은 새 직업도, 새 취미도 아니다. 노동이 남긴 빈자리에 넣어야 할 것은 ‘할 일을 스스로 정하고, 그 선택의 결과를 자신의 책임으로 받아들이는 태도’다. 사르트르는 이런 태도를 앙가주망(engagement)이라 불렀다. 그에게 앙가주망은 자신의 자유를 자각하고, 그 자유를 현실 속에서 행위로 드러내며, 그 결과를 책임지는 실천적 태도였다.
여전히 표현하는 존재
AI로 인해 일하지 않는다는 『영수와 0수』의 설정은 이제 단순한 사이언스 픽션으로 들리지 않는다. 많은 전문가들이 ‘노동하지 않는 인간’의 등장을 예견하고, 나 또한 그 징후를 피부로 느낀다. 어쩌면 우리는 이미 사르트르가 말한 ‘자유의 무게’ 속에 들어와 있는지도 모른다. 노동이 사라지고, 사회가 더 이상 나의 역할을 요구하지 않을 때 인간은 다시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나는 무엇으로 존재할 것인가.”
내가 몸담고 있는 영화감독이라는 직업도 사라질지 모른다. AI가 영화를 만들고, 인간의 노동이 더 이상 필요치 않은 시대가 오더라도 나는 여전히 표현하는 존재로 살아가고자 한다. 직업이 나를 규정하지 않더라도, 표현하고자 하는 선택, 그리고 그 선택을 실천하려는 행위 속에서 나는 나의 본질을 계속 구성해 갈 수 있을 것이다. 아마 그것이, “존재가 본질에 앞선다”라는 말이 오늘의 우리에게 여전히 유효한 이유일 것이다.
주재훈 칼럼니스트 woqkd200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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