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의 시대인가. 역사 속 주도권의 이동은 반복되어 왔다. 어떤 시절에는 세대 간 갈등이, 또 어떤 기간에는 계층 간 충돌이 시대의 축을 흔들었다. 지금 벌어지는 이 변화는 철저히 기술이 주도하는 외생적 전환이다.기존의 틀과 리듬을 송두리째 바꾸는, 본질적이고 구조적인 변화다.

영화 산업에서 벌어진 '사건' 하나

이런 흐름 속에서, 최근 국내 콘텐츠 산업에서 하나의 ‘사건’이 일어났다. CJ ENM이 공개한 AI 애니메이션 프로젝트 ‘캣 비기(Cat Biggie)’는 단순한 기술 실험을 넘어, AI 기반 제작 생태계가 주류 시스템에서 공식 채택된 결정적 사례다.

CJ ENM이 공개한 AI를 활용해 자체 제작 애니메이션 '캣 비기' 이미지=CJ ENM
CJ ENM이 공개한 AI를 활용해 자체 제작 애니메이션 '캣 비기' 이미지=CJ ENM

이 프로젝트에서 CJ ENM은 분명히 선언했다. “AI는 크리에이티브의 보조 수단이 아니라, 미래형 제작 구조의 중심이다.”

실제 결과도 눈길을 끈다. '캣 비기'는 2분짜리 애니메이션 30편(총 60분 분량)을 단 5개월 만에 완성했다. 이는 기존 3D 애니메이션이 5분 1편 제작에 3~4개월 이상 걸리던 제작 패러다임을 뿌리째 흔드는 속도다. 기술의 발전은 단지 시간 단축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는 시간 감각 자체의 재정의, 즉 ‘시간의 혁명’이다.

세계는 이미 동시다발적 변화 중

이 변화는 한국만의 일이 아니다. 넷플릭스는 이미 일부 애니메이션에 ‘에피소드 단위의 주간 제작 시스템’을 도입했다. 일본의 신생 스튜디오들은 AI 음성 및 배경 생성 기능을 활용해 기존 인력의 절반 이하로 단편 애니메이션을 제작하고 있다.

미국 스타트업 런웨이(runway)는 영화 수준의 영상 합성을 실시간으로 개선하며, ‘스튜디오 없는 창작자’의 시대를 현실로 만들고 있다. 전 세계 콘텐츠 산업이 ‘기획에서 상영까지 3년’이라는 전통적 제작 시간의 신화를 스스로 깨고 있는 것이다.

칼의 시대는 총으로 끝났다. 내전이 잦았던 일본에선 총이 들어오면서 전투의 양상 자체가 달라졌다. 이미지=챗GPT(DALL-E) 생성
칼의 시대는 총으로 끝났다. 내전이 잦았던 일본에선 총이 들어오면서 전투의 양상 자체가 달라졌다. 이미지=챗GPT(DALL-E) 생성

이런 변화는 과거에도 있었다. 내전이 잦았던 일본 사무라이 시대에는 칼이 권력과 계급과 사회 질서의 상징이었다. 그때 총 한 자루는 전쟁과 사회의 판도를 바꿨다. 그처럼 주도권의 교체는 언제나 내부에서가 아니라 기술이라는 외생 변수에서 비롯된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도 마찬가지다. 콘텐츠 산업이라는 거대한 전장에서, AI 기반의 디지털 크리에이터들이 주도권 전면에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주류는 항상 숫자 많은 쪽이 차지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여기에 생성형 AI라는 신기술이 총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디지털 크리에이터의 과제

AI영화제작에 대한 인식이 바뀌고 있다고, 주류가 될 가능성이 높아졌다고 좋아할 일만도 아니다. 시대 변화의 본질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 비용 때문에, 싸다는 이유로 불려다니는 사람들은 결국 2, 3류를 벗어나지 못한다. 아무리 호화로운 요트라도 얻어타면 남의 배일 뿐이다. 스스로 배를 만들어야 한다. 생텍쥐페리의 조언을 잊지 말라.

"배를 만들게 하려면, 나무를 모으거나 도구 사용법을 가르치기 전에 먼저 광활한 바다를 꿈꾸게 하라."

이를 스스로에게 적용하면 디지털 창작자 자신이 광활한 바다, 이왕이면 블루오션을 꿈꾸어야 한다.  AI 툴을 빠르게 다루는 능력만으로는 절대 충분치 않다.오히려 중요한 것은 콘텐츠의 기획력, 큐레이션 능력, 감동을 설계할 줄 아는 ‘이야기 창조자’로서의 감각이다.

집안에 틀어박혀 밤새 게임을 즐기던 20대가 세계적 히트 영화의 감독이 될 날도 머지않았다. 이미지=챗GPT(DALL-E) 생성  
집안에 틀어박혀 밤새 게임을 즐기던 20대가 세계적 히트 영화의 감독이 될 날도 머지않았다. 이미지=챗GPT(DALL-E) 생성  

필자는 디지털 창작자들이 ‘AI 르네상스적 인간’을 목표로 했으면 한다. 르네상스 시대의 작가들이 그랬던 것 처럼, 한 분야에 국한되지 않고 다학제적 상상력과 융합 역량을 갖춘 사람이 돼야 한다. 영상 뿐 아니라 작사 작곡 디자인 그리고 문학작가적 재능까지 갖추기 위해 스스로를 극한까지 닦아야 한다. 그럴 때 시간혁명의 주도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권영설 주필 yskwon@kmjournal.net

권영설 칼럼니스트는 한국경제신문 기자, 논설위원, 기조실장 등을 지냈고 이코노믹데일리 편집국장, 미디어펜 사장을 역임한 언론인이다. 형지그룹 기조실장과 형지엘리트 사장 등 기업인으로도 활동했다. 현재 섬유신문 사장으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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