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넘게 언론사에 몸담았지만, 칼럼 마감은 여전히 고통스럽다. 생각을 짜내야 하고, 마감에 늦어 제작에 차질이 생기진 않을까 전전긍긍한다. 마감이 없었다면 글을 쓰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언론 칼럼이 순수 문학은 아니지만, 창작의 고통만큼은 결코 다르지 않다.
그래서 나는 두 사람이 늘 부러웠다. 무협의 신필 김용, 그리고 ‘해리 포터’의 작가 조앤 K. 롤링. 김용은 1,500만 자가 넘는 장편을 거침없이 내달렸고, 롤링은 런던에서 맨체스터로 향하는 기차 안에서 떠오른 한 장면을 갖고 수억 명의 독자에게 새로운 세계관을 선물했다.
이 두 사람에게서 공통으로 보이는, 끝없이 분화하는 상상력과 한숨에 밀어붙이는 필력, 그것은 범접 불가의 영역처럼 보였다.
창작의 문법이 바뀌고 있다
2016년 이세돌과 알파고의 대국은 바둑계 전체를 흔든 사건이었다. 단지 인간이 AI에게 패했다는 뉴스 이상의 의미였다. 바둑이라는 게임 자체의 ‘좌표계’가 바뀐 것이다.
이후 일부 기원과 오프라인 교육은 위축되었지만, AI 복기 시스템을 활용한 바둑 학습은 오히려 폭발적으로 확산됐다. 프로 기사들도 이제는 AI의 수법을 연구하고, 창의적 실험의 장으로 바둑을 새롭게 해석하고 있다. 조훈현, 이창호의 기보를 넘어 전례 없는 수를 응용하고 실험하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그리고 지금, 같은 변화가 ‘작가의 세계’에서도 시작되고 있다. 김용과 롤링 등 기성 작가들만의 영역으로 느껴졌던 그 필력. 지금은 챗GPT, 클로드, 제미나이 같은 생성형 AI가 확실히 보완해준다. 문장은 더 이상 고통의 독백이 아니라, 인간과 AI가 주고받는 생산성 높은 대화로 바뀌고 있다.
특히 AI의 분량 생성 능력은 사실상 무한대에 가깝다. 나의 '동업자' AI가 '건필(健筆)'로 옆에 있으면 예전의 에너지만 투입해도 10배 이상의 산출물을 얻을 수 있다. 마감을 못해 낭패를 보는 일은 없고 오히려 의욕이 앞설 때가 많다.
이 흐름은 숫자로도 확인된다. 2025년 현재, 전 세계 콘텐츠 크리에이터의 절반 이상이 생성형 AI 도구를 사용하고 있다. 블로거의 80%가 초고 작성과 편집에 AI를 활용하며, 기업의 70% 이상이 콘텐츠 생산 과정 어딘가에 AI를 도입했다. AI 책이 쏟아진 탓에 아마존 킨들은 자가출판 권수를 제한할 정도다.
양이 갑자기 늘어나다 보니 문제도 많다. 표절 시비, 가짜 리뷰, 저작권 혼란, 알고리즘 조작… AI가 만든 그늘은 분명 작지 않다. 사람이 AI 도구를 사용해 쓴 것을 과연 창작물로 볼 수 있는지 논쟁도 많다.
분명한 것은 AI가 이번에도 다시 인간 창의성에 도전하고, 그만큼 새로운 혁신의 자극제가 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람들은 오히려 창작이란 무엇인가, 글쓰기란 어떠해야 하는가 같은 근본적인 질문을 다시 하는 '여유'가 생겼다.
그 방향은 결국 도구가 아무리 좋아져도 "무엇을 묻고, 어떤 세계를 그릴 것인가"는 여전히 인간의 영역으로 남는다는 결론쪽으로 간다. 거기에 창작이 있고 거기에 예술이 있고 거기에 인간이 있다. 인간 본연의 기능인 상상력은 다시 진화하는 계기를 맞는다는 얘기다.
지난주 금요일 열린 GMAFF(Global Metaverse AI Film Festival) 시상식에서는 AI를 활용해 영화를 제작한 '감독'들이 '데뷔'했다. 배우도 없고, 촬영도 하지 않았지만, 그들의 출품작엔 독특한 시선과 새로운 감정이 있었다. "아직 서툴지만 신선하다"는 평을 받았다.
디지털 창작자들은 이제 촬영, 편집, 음악에서 해방된 대신 온전히 상상력과 이야기에 몰입할 수 있는 시대를 맞이한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존재한 적 없는 질문’을 던지고, 그 질문에서 탄생한 감정의 파편들을 서사로 엮는 일이고, 진정한 의미의 창작에 가까운 것이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말했다.
“상상력은 지식보다 중요하다. 지식은 한계가 있지만, 상상력은 온 세상을 품는다. 상상력은 진보를 자극하고, 결국 진화를 낳는다.”
우리는 지금 ‘호모 사피엔스’를 넘어 ‘호모 이마지나리우스(Homo Imaginarius)’ 즉, 상상하는 인간으로 진화하는 길목에 서 있다. 상상력은 더 이상 고정된 능력이 아니라, 시대에 따라 진화하는 본능이다. 새로운 도구는 우리에게 더 넓은 상상의 무대를, 더 깊은 창작의 가능성을 열어준다.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단 하나. 이 진화의 문을 두려움 없이 열고, 상상력의 미래를 써 내려가는 것이다. 디지털 창작자들은 그 가능성을 보고 도전하는 이들이다. 그들을 응원한다.
권영설 주필 yskwon@kmjourna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