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곳곳에서 디지털 창작자들이 봄날의 새싹처럼 피어나고 있다. 영상, 음악, 시나리오, 소설, 일러스트, 캐릭터 디자인, AI 기반 미디어 아트까지. 같은 분야 사람들이 모인 커뮤니티 사이트를 들어가보면 회원이 기본 50만 명에 달한다.
국내에서도 디지털 창작자들이 눈에 띄게 늘고 있다. 본지가 주최한 GMAFF(Global Metaverse AI Film Festival)를 비롯 AI 기반 영화제, 영상공모전에 수백 명 이상이 출품하고 있다. 그중 절반 이상은 전문 교육을 받지 않은 1인 디지털 창작자들이다. 유명 배우도, 값비싼 장비도, 수억 원의 제작비도 없다. 그러나 이들은 어엿한 감독으로 데뷔한다. 오히려 이들의 숫자가 많아지면서 '그들만의 리그'는 깨지고 있다.
이들이 생산하는 창작물은 이제 콘텐츠를 넘어 지식재산(IP, Intellectual Property)으로 진화하고 있다. 날개를 달면 차세대 경제력의 핵심 축이 될 것이다. 그러나 제도는 여전히 이 변화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 현실의 속도는 하루가 다른데, 제도는 20세기에 머물러 있는 형국이다.
실제로 국세청의 업종 코드나 고용보험 직업 분류표 어디에도 ‘AI 기반 디지털 창작자’라는 항목은 없다. 영상 크리에이터, 1인 미디어, 프리랜서 등으로 간신히 흡수되지만, 이들의 복합적이고 유동적인 활동의 본질을 담기엔 역부족이다. 새로운 직업군을 정확히 정의하고, 체계적으로 지원하는 미래형 제도 설계가 절실하다.
창작은 이미 거대 산업
전문 영역이라고 봐서 그럴까, 아니면 노력이 별로 들지 않는 것으로 치부해서일까. 콘텐츠 산업이 숫자로 보여주는 실적에 비해 그 가치에 대한 인정은 별로 받지 못하는 듯 하다.
콘텐츠 수출은 대부분 무형재의 형태로 발생해 전통적인 무역 통계에는 포착되지 않는다. 관세청의 10대 수출품목 순위에는 없지만, 문화체육관광부의 산업통계에 따르면 콘텐츠 산업은 2022년 132억 달러 이상의 수출을 기록하고 있다. 이는 가전(94억 달러) 조선(44억 달러) 등 전통 산업을 뛰어넘는 수치다. 콘텐츠 산업 전체 매출은 147조 원, 종사자는 약 66만 명에 달한다. 이미 우리 경제의 주력 산업으로 자리매김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주목해야 할 부분은 AI 기반 창작 생태계의 급성장이다. 창작의 문턱이 기술력 덕분에 낮아지면서 성장 가능성은 짐작조차 어려울 정도다.
일본과 프랑스는 이미 움직였다
일본은 2024년, '크리에이터 경제'를 국가 신성장 전략의 핵심 축으로 선언하고, 창작자·1인 IP기업·스타트업에 대해 보조금, 세제 혜택, 교육 정책을 총동원해 전방위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경제산업성이 메타버스·게임·AI 영상 분야에서 AI 크리에이터 생태계 조성을 위해 투입한 예산만 약 800억 엔(약 7,200억 원)에 달한다. 크리에이터 전문 직업훈련 과정까지 신설했을 정도니 이미 관련 인재 양성이 체계를 잡았다고 봐야 한다.
프랑스도 전향적이다. 문화 예산 44억 유로 가운데 15억 유로(약 2.3조 원)를 영상, 디지털 미디어, 게임, 문학 등 신(新) 창작 분야에 배정한 것을 보면 의지를 읽을 수 있다. ‘장인(Artisan)’이라는 전통 예술공예 기반의 제도에서 더 나아가, 디지털 아티스트와 1인 미디어 창작자도 지원 대상에 포함시키며 발 빠르게 전환하고 있다.
규모의 경제 vs 상상력의 경제
우리 정부는 아직 이 변화의 파도에 제대로 올라타지 못하고 있다. 무관심해서라기 보다는 너무 빠른 창작 경제(Creation Economy)의 성장 속도를 정책이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단순히 창작자 숫자가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 이들이 곧 새로운 경제 주체가 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디지털 창작자는 콘텐츠의 소비자가 아니라 생산자이자, IP를 보유한 독립 사업자다. 이들은 영화도 만들고, 노래도 부르고, 캐릭터를 창조하며, 유튜브·틱톡·NFT로 실질적 수익을 창출한다.
한 명이 두세 개 많게는 다섯 개 이상의 전문 직능을 갖춘 멀티 크리에이터(Multi-Creator)로 활동한다. 이들은 단순한 포트폴리오 보유자가 아니라 복수의 지식재산을 소유하고 운영하는 ‘1인 콘텐츠 창작 엔진’으로 봐야 옳다.
창작자들의 숫자가 늘면서 시장의 논리에도 균열이 생기는 게 보인다. 기존 산업에 오랫동안 있었던 ‘규모의 경제’ 논리 자체가 무너지기도 한다. 영화만 봐도 수십억 원의 제작비, 수백 명의 스태프가 훨씬 유리한 상황이 더 이상 아니다. 기획부터 상영까지 3년이 걸린다면 그 아이디어와 스토리가 과연 경쟁력이 있겠는가. 아이디어와 기획을 즉시 반영하고 시장에 내놓을 수 있는 것은 이제 규모가 아니라 상상력이요, 실행력이다.
그렇다고 정부가 도와주려고 너무 힘을 줄 필요는 없다.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이 말했듯이 '가장 무서운 말은 정부에서 도와주러 왔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창작자들이 만들어낸 흐름에 이름을 붙이고 기반을 마련해주는 후원자 역할 정도면 충분하다. 그게 창작 경제의 논리와도 맞을 것이다.
권영설 주필 yskwon@kmjourna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