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은 충분하다, 이제는 말의 시대다
경주 APEC 정상회의의 가장 큰 화제는 회의장 밖에서 터졌다.
엔비디아의 젠슨 황 CEO가 서울 삼성동 거리를 거닐며 ‘깐부치맥’을 즐기던 장면, 그리고 이재명 대통령과의 회담에서 삼성,현대,SK,네이버가 나란히 반도체와 AI 협력을 논의한 장면이 전 세계로 퍼졌다. 하지만 그 열기 속에서 LG그룹의 이름은 보이지 않았다. 이번 APEC에서도 LG는 대형 발표나 외교적 이벤트 없이 조용히 자리를 지켰다.
‘AI 3대 강국’을 향한 국가 비전의 무대에서, LG는 왜 이토록 조용했을까?
활약이 없어서가 아니라, 활약의 방식이 달랐기 때문이다. LG는 이번 APEC에서 겉으로 보이는 무대 대신, 인프라/홍보/운영 지원 등 ‘행사의 뒤편’을 맡았다. 통신망, 정보시스템, 지역 홍보 협력, 장애청소년 IT 프로그램 지원 등 실무형 참여에 집중했다. 이는 LG다운 선택이었다. 과시보다 실질을 중시하는 문화, 그리고 조용히 성과를 쌓는 조직 DNA. 하지만 무대 뒤의 공헌은 헤드라인으로 남지 않는다.
사실 LG의 이런 조용한 존재감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AI 산업의 핵심 국면에서도 LG는 늘 실체보다 덜 드러나왔다. 삼성은 ‘Gauss’ 모델과 반도체 생태계를, SK는 AI 반도체와 에너지 전환을, 현대차는 자율주행·로보틱스와 연결된 ‘AI 모빌리티’를 내세운다. 각 그룹의 리더가 직접 메시지를 던지고, 각자의 서사로 AI 시대의 비전을 설명한다. 반면 LG는 기술적으로 뒤처지지 않지만, 자신의 이야기를 세상에 적극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LG AI연구원은 2021년 ‘EXAONE’을 공개하며 국내 최초의 초거대 언어모델을 개발했다. 2025년에는 4.0 버전까지 진화했고, 멀티모달 기능·자체 데이터셋·이미지 생성 AI까지 완비했다. LG CNS는 기업용 AI 플랫폼을 상용화했고, LG유플러스는 B2B 전환을 중심으로 네트워크 전반을 AI화하고 있다.
LG전자는 엔비디아와 손잡고 피지컬AI,디지털트윈,AI 데이터센터 분야 협력을 강화하고 있다. 가전/산업 현장에서 축적한 데이터를 기반으로 로봇 학습용 피지컬AI 모델을 개발하고, 엔비디아의 ‘옴니버스’ 플랫폼을 활용해 스마트팩토리와 냉각솔루션 기반 AI 데이터센터 등 미래 산업 인프라를 함께 구축 중이다.
LG이노텍은 제조 현장의 자율공정 시스템을 확장하고 있다. 이 모든 걸 종합하면 LG는 한국에서 가장 폭넓은 AI 생태계를 실제로 갖춘 그룹 중 하나이다. 그런데도, 그 실체가 대중의 인식 속에서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이 차이는 ‘기술력’이 아니라 ‘언어력’에서 생긴게 아닐까.
LG는 여전히 ‘고객경험 향상’과 ‘인간 중심 기술’ 같은 추상적 문장으로 스스로를 설명한다. 반면 삼성은 ‘AI Everywhere’, SK는 ‘AI로 사회적 가치를 확장한다’, 현대는 ‘Future Physical AI Mobility’라는 명확한 기표를 가진다. LG의 기술은 강하지만, AI에 대한 브랜드 언어가 약하다. EXAONE은 기술적 성취지만, 사람들의 언어 속으로 들어오지 못했다. LG는 ‘AI를 잘하는 기업’이지만, ‘AI를 상징하는 기업’은 아니다.
또 하나는 ‘얼굴의 부재’다.
AI는 기술이지만, 동시에 서사의 산업이다. 엔비디아 젠슨 황, 삼성 이재용, SK 최태원, 현대 정의선 회장은 단순히 경영자가 아니라, 각 그룹의 AI 내러티브를 대표하는 상징이다. 반면 LG 구광모 회장이 대중 앞에 나서서 연설하는 장면은 거의 기억나지 않는다. 조직이 기술 중심으로 움직이는 만큼, 사람의 서사는 뒤로 밀린다. 그러나 AI 시대의 경쟁은 결국 누가 더 깊이 말할 수 있느냐의 경쟁이다.
이건 LG의 약점이자 동시에 기회다.
LG는 보여주기보다 실질을 중시하는 기업 문화 덕분에 기술의 깊이가 단단하다. R&D 중심의 인프라와 신중한 실행력은 AI 생태계의 ‘조용한 뼈대’ 역할을 한다. 문제는 그 실체를 국가 서사 속에 어떻게 녹여낼 것인가다. AI 강국은 기술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국민이 공감할 ‘스토리’와 세계가 기억할 ‘언어’가 필요하다.
LG가 해야 할 일은 단순한 홍보가 아니다.
AI 시대의 방향을 자신만의 언어로 말하는 것이다. ‘인간 중심’이라는 추상적 문장을 넘어, 신뢰·정직·생활 속 혁신이라는 LG다운 철학을 산업의 언어로 구체화해야 한다. 그것이 LG가 대한민국 AI 전략에 기여할 수 있는 진짜 방식이다. AI 시대의 승부는 결국, 누가 더 크게 말하느냐가 아니라 누가 더 진정성 있게 말하느냐에 달려 있다. LG는 그 진정성의 언어를 이미 가지고 있다. 이제는, 그 언어를 조금 더 크고 선명하게 들려줄 차례다.
비즈인사이트 칼럼니스트 yoian@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