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의 ‘정책 신호’와 정의선의 ‘전략적 결단’이 만나다
지난 APEC 회의가 끝난 후, 정의선 회장을 떠올릴 때 유독 선명하게 기억나는 장면이 하나 있다.
이재명 대통령과 엔비디아 젠슨 황 CEO가 AI 산업 협력 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만난 지난달 31일, 그 자리에는 정의선 회장도 참석했다. 참석자들을 맞이하던 대통령에게 다가선 정 회장은 “이번에 관세 관련해 너무 감사드립니다. 정부 분들이 너무 잘해주셔서 제가 큰 빚을 졌습니다”라고 거듭 인사했다. 이에 대통령이 “현대차가 잘 되는 게 대한민국이 잘 되는 것”이라고 답하자, 정 회장은 곧바로 “열심히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라며 다시 한 번 고개 숙였다.
“큰 빚을 졌습니다”라고 말하던 이 장면은 단순한 예의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다.
정부가 한국의 대표 기업들을 위해 정책을 추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도, 기업 총수의 입에서는 “빚”이라는 말이 나온다. 이는 지난 수년간 기업들이 정부 정책에 얼마나 큰 기대를 하기 어려웠는지, 그 불신과 거리감이 얼마나 깊었는지를 은근히 드러내는 순간이기도 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대통령실에서 열린 민관 합동회의. 국내 주요 그룹 총수들이 참석한 자리에서 정의선 회장은 현대차그룹 역사상 최대 규모인 향후 5년간 125조2,000억 원의 국내 투자 계획을 공식 발표했다. APEC 직후 그 인사의 여운을 떠올리면, 이 투자 발표는 더욱 묵직한 의미로 다가온다.
“큰 빚을 졌다”는 표현은 결국 “이제 한국에서 다시 제대로 해보겠다”는 결심이 이미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일종의 전조였던 셈이다.
관세 불확실성이 해소되고 글로벌 환경 변화에 대응할 시점이라고 판단한 현대차는 이번 투자를 “한국에서의 재시작”으로 규정했다. 그 내용은 세 가지로 압축된다. AI·로봇 중심의 미래 신사업, 글로벌 표준을 다시 설계하기 위한 R&D 강화, 그리고 제조 혁신과 인프라 현대화를 위한 경상투자다. 이는 단순한 경기 부양도, 보여주기용 발표도 아니다. 기술 패러다임 대전환 속에서 현대차가 “국내”를 전략적 플랫폼으로 재정의한 총체적 움직임이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전체 투자 가운데 절반 가까이가 AI, 로봇, 자율주행, SDV에 집중된다는 점이다.
이는 현대차가 어떤 기업으로 다시 태어나려 하는지 명확하게 말해준다. 자동차 산업이 소프트웨어 중심으로 전환되는 시대에 현대차는 한 발 더 나아가 피지컬 AI 데이터센터, AI 애플리케이션 센터, 로봇 파운드리를 직접 구축하려 한다. 엔진 공장·차체 공장 중심이던 전통 제조 구조는 점차 뒷자리에 놓이고, 그 자리는 AI 모델 학습·자율 제조 알고리즘·로봇 성능 검증 센터가 채우게 된다. 현대차가 ‘자동차 기업’을 넘어 ‘AI 기반 미래 제조 기업’으로 탈바꿈하려는 근본적 전환이며, 이는 한국 제조업 전체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신호탄이기도 하다.
수소 생태계 투자도 빼놓을 수 없다.
서남권에 1GW 규모 수전해 플랜트를 짓고, 저장·출하 인프라를 강화하며, 정부·지자체와 함께 ‘수소 AI 신도시’까지 구상하고 있다. 한국은 수소 상용화에 강점을 보유한 보기 드문 국가다. 비록 수소 산업은 기술적·경제적 불확실성이 크지만, 현대차는 이를 전기차 이후의 또 다른 축으로 삼았다. 전기차 수요 변동, 미국·유럽의 보호무역 강화, 글로벌 공급망 재편이라는 현실 속에서 현대차는 수소를 미래 제조·모빌리티·AI 기술과 결합된 전략 산업으로 재정의하고 있다.
협력사 관세 지원 방침 또한 현대차의 변화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미국향 관세를 1차 협력사 대신 현대차가 전액 부담하겠다는 결정은 단순한 지원을 넘어 공급망 전체를 미래 전환 속에서 함께 끌고 가겠다는 의지다. 전동화·자율주행·AI 전환이 가속화될수록 공급망은 더 복잡해지고 중소 협력사의 역할은 더 중요해진다. 현대차는 이번 발표로 “협력사의 체력이 곧 현대차의 체력”이라는 사실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셈이다.
결국 현대차그룹의 125조 투자는 규모보다 방향이 더 중요하다.
AI 기반 제조 체제로의 전환, 수소 생태계 구축, SDV 기술 경쟁력 강화, 국내 생산기지의 글로벌 마더팩토리화. 이 모든 흐름은 한국 제조업의 체질을 바꾸고 미래 산업 지형을 다시 그리려는 큰 그림이다. 그리고 그 그림의 첫 페이지에는 정의선 회장의 그 한 문장이 있다.
“큰 빚을 졌습니다.”
그 말은 단순한 감사 인사가 아니라, 한국에서의 ‘두 번째 창업’을 준비하는 기업인의 깊은 결심이 담긴 선언이었는지도 모른다.
비즈인사이트 칼럼니스트 yoian@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