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 클래식 작품을 실감나는 'KMJ 뮤지엄'의 XR 공간에서 만나보세요.

친절한 도슨트와 함께 이제 '주말엔 아트'입니다.

녹아내리는 시간, 초현실주의의 꿈

오늘 우리는 스페인의 초현실주의 거장, 살바도르 달리의 대표작 <기억의 지속> 앞에 서 있습니다. 이 그림은 우리에게 시간과 현실에 대한 깊은 질문을 던지며, 꿈과 무의식의 세계로 인도합니다.

살바도르 달리, 기억의 지속 (1931), 캔버스에 유화
살바도르 달리, 기억의 지속 (1931), 캔버스에 유화

작품명: 기억의 지속

작가: 살바도르 달리

제작 연도: 1931년

기법: 캔버스에 유화

크기: 24.1 × 33 cm

소장처: 뉴욕 현대 미술관

혼돈의 시대, 깨어나는 무의식

이 그림이 탄생한 1930년대는 전 세계가 혼돈과 격변을 겪던 시기였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상흔이 채 아물기도 전에 경제 대공황이 전 세계를 휩쓸며 불안감이 팽배했습니다. 이처럼 외적 현실이 불안정해지자, 많은 예술가와 사상가들은 인간의 내면과 무의식으로 시선을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은 꿈과 잠재의식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인간 이해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으며,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은 시간과 공간에 대한 기존의 절대적인 개념을 흔들었습니다. 달리 역시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를 온몸으로 흡수하며, 우리가 평소 인지하지 못하는 내면의 풍경을 화폭에 펼쳐 보였습니다. <기억의 지속> 은 바로 이 시기의 집단적인 불안감과 개인의 무의식적 갈등이 예술적으로 승화된 지점에서 탄생했습니다.

현실과 비현실 사이

살바도르 달리는 독특한 화가였습니다. 그는 철저한 사실주의적 기법으로 환상적이고 비현실적인 이미지를 그려내는 데 탁월했습니다. 마치 꿈속에서 본 듯한 장면들을 극도로 세밀하게 묘사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이것이 진짜인가, 아니면 환상인가?' 하는 혼란을 안겨주었죠. 그의 작품은 논리적 사고로는 이해할 수 없는 비이성적인 이미지들로 가득 차 있었지만, 놀랍도록 정교한 붓 터치와 색채는 그 비현실성에 압도적인 현실감을 부여했습니다. 이처럼 '정교한 비현실성'이야말로 달리가 전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된 가장 큰 이유 중 하나이며, <기억의 지속> 은 달리의 이러한 예술적 특징이 정점에 달한 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녹아내리는 시간, 기이한 상징들

녹아내린 듯, 흐르고 있는 시계

황량하고 적막한 풍경 속에 놓인 세 개의 녹아내리는 시계가 시선을 사로잡습니다. 마치 치즈처럼 흐물흐물 녹아내리는 이 시계들은 시간을 초월하는, 혹은 시간이 더 이상 물리적 법칙에 얽매이지 않는 무의식의 세계를 상징합니다. 딱딱하고 정확해야 할 시간이 부드럽게 흘러내리는 모습은 우리에게 시간의 상대성과 유한함, 그리고 시간의 속박에서 벗어나고 싶은 인간의 욕망을 속삭이는 듯합니다.

왼쪽 시계 위 파리와, 오른쪽의 속눈썹이 두드러진 사람 얼굴 형상
왼쪽 시계 위 파리와, 오른쪽의 속눈썹이 두드러진 사람 얼굴 형상

테이블 위, 흘러내린 시계에는 파리가 앉아 있습니다. 이 파리는 죽음, 부패, 혹은 시간의 덧없음을 암시하는 전통적인 상징으로 해석되기도 합니다. 그림 중앙에는 기이한 형태의 하얀 물체가 누워 있습니다. 마치 녹아내린 시계의 연장선 같기도 하고, 인간의 얼굴 같기도 한 이 부드러운 형상은 꿈속에서 자주 등장하는 무의식의 변형된 이미지이자, 달리의 자화상으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그의 길고 늘어진 속눈썹은 마치 잠들어 있는 듯, 혹은 깊은 꿈속을 유영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시계를 감싼 개미들
시계를 감싼 개미들

그림 왼쪽 하단에는 주황색의 단단한 시계가 개미 떼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개미는 부패와 죽음, 혹은 강박 관념을 상징하는 달리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모티프입니다. 단단한 시계와 그 주위를 맴도는 개미들은 고정된 시간과 그것을 잠식해 들어가는 불안을 표현하는 듯합니다. 멀리 보이는 푸른 바다와 수평선은 광활하지만 동시에 어딘가 쓸쓸한 느낌을 주며, 꿈속의 무한한 공간을 연상시킵니다.

현실과 시간에 대한 초월적 메시지

이 작품은 시간에 대한 인간의 인식, 존재의 유한함, 그리고 무의식의 광활한 영역에 대한 명상으로 우리를 이끌어 갑니다. 달리는 이 그림을 통해 '무의식이 우리에게 펼쳐 보이는 세계가 논리적인 현실보다 더 진실할 수 있다'는 초현실주의의 핵심 메시지를 가장 시각적이고 감성적인 언어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정소희 인턴기자  jshee417@gmail.com

관련기사
저작권자 © KMJ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