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워진 문명, 무거워진 질문
“앞으로는 2만 명이 필요한 피라미드를 열 명으로 만들 수 있다.”
《경량문명의 탄생》에서 송길영 작가는 이렇게 선언한다. 거대 조직과 대규모 자본이 독점하던 생산의 시대가 저물고, 인공지능이라는 증강 수트를 입은 개인과 소규모 팀이 새로운 문명을 열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이것을 “경량문명”이라 부른다.
거인의 어깨에서 내려오는 시대
근대 산업문명은 규모와 무게의 논리로 움직였다. 토지, 원자재, 제조설비라는 유형 자산이 문명의 핵심이었다. 생산 단위를 키울수록 단가가 낮아지고, 시장 지배력이 높아졌다. 공장, 산업단지, 발전소, 도로망… 모두가 거대함을 기반으로 했다. ‘규모의 경제’는 곧 생존의 조건이었고, 기업은 더 큰 판돈을 쥔 자만이 살아남는 게임을 강요받았다.
그러나 AI가 등장하며 균열이 생겼다.
단순한 반복 노동은 물론이고, 번역·계약 검토·영상 편집 같은 전문직의 일부 영역까지 대체 가능해졌다. 그 결과, 혼자서도 ‘작은 기업’이 될 수 있는 시대가 열렸다. 텔레그램을 30명이 운영하고, 미드저니는 40명이 이끌며, 어떤 생성형 AI 스타트업은 단 한 명이 회사를 굴린다. 거대 조직만의 특권이었던 생산과 혁신이, 소수 인원으로도 가능해진 것이다.
개인의 증강, 조직의 재편
송작가는 이러한 변화를 “핵개인”의 진화로 설명한다. 이미 1인 크리에이터, 1인 개발자 흐름 속에서 개인의 힘은 커지고 있었다. 여기에 AI가 붙으면서, 개인은 마치 건담 수트를 입은 듯 증강된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증강된 개인들이 협력할 때, 기존의 조직 논리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과거의 조직은 피라미드형 위계와 관료제에 기댔다.
하지만 경량문명은 다르다. ‘업무(Task)’ 단위로 빠르게 협력하고, 프로젝트가 끝나면 흩어졌다가 필요할 때 다시 모인다. “우리는 지금 만납니다. 잠시 만납니다. 그리고 다시 만납니다.” 그가 제시하는 경량문명의 세 가지 규칙은, 영구 고용 대신 단속적 협력, 평생직장 대신 프로젝트 중심 관계를 보여준다.
이는 냉정하지만 현실적이다.
기업 입장에서 속도는 곧 경쟁력이다. 여러 결재 단계를 거치는 동안 의사 결정이 늦어지면 시장에서 밀려난다. 따라서 조직은 불필요한 단계를 제거하고, 가능한 한 가볍게 움직이려 한다. 그 과정에서 기존의 중간 관리자 역할이나 도제식 인력 양성 구조는 사라질 수밖에 없다.
교육과 고용의 패러다임 전환
그렇다면 개인은 어떻게 대비해야 할까. 《경량문명의 탄생》은 교육과 고용의 변화를 주목한다. 팔란티어 CEO 알렉스 카프는 “나는 대학 졸업자를 뽑지 않겠다. 직접 가르치겠다”고 선언했고, 쇼피파이 CEO는 “AI가 못 하는 일을 증명해라”라는 조건을 내걸었다. 더 이상 학벌이나 이력은 안전망이 아니다. 결과와 역량만이 평가 기준이 된다.
이런 흐름은 젊은 세대에게 불안하다. 기존처럼 대기업 대규모 채용을 기대하기 어렵다. 동시에 기성세대에게도 위기다. 조직 경험과 관리 능력만으로는 더 이상 경쟁력이 되지 않는다. 결국 세대와 상관없이 “AI와 함께 무엇을 만들어낼 수 있느냐”가 핵심이 된다.
무겁고 가벼운 문명 사이에서
경량문명의 반대편에 ‘중량문명’을 놓는다. 땅에 기반한 산업단지, 설비, 대규모 조직… 모두가 무겁다. 하지만 이 무게는 더 이상 효율을 담보하지 않는다. 오히려 속도와 유연성을 가로막는다. 경량문명은 이 무게를 덜어낸다. AI와 자동화, 플랫폼 협력 구조를 통해 최소 인원으로 최대 성과를 낸다.
그러나 질문은 남는다. 과연 이 변화가 모두에게 축복일까? 개인은 자유로워졌지만 동시에 불안정해졌다. 조직이 사라지면, 초보자들이 배울 기회는 어디서 만들어질까? 숙련을 쌓을 발판이 없어진 사회에서 새로운 전문가가 어떻게 탄생할까?
문명은 소비가 아니라 협력의 방식
《경량문명의 탄생》이 던지는 핵심 메시지는 이것이다. 문명이란 결국 ‘협력의 방식’이다. 과거에는 토지와 자본을 매개로 협력했지만, 이제는 AI와 네트워크를 매개로 협력한다. 문명은 소비가 아니라 생산과 협력의 패턴이기 때문이다.
독자로서 이 책을 읽고 나면 묵직한 질문이 따라온다. 나는 AI 시대의 동료를 맞을 준비가 되어 있는가? 내 일은 AI와 함께 더 커질 수 있는가, 아니면 사라질 일인가?
경량문명은 이미 시작되었다. 이제 선택은 남아 있지 않다. 남은 것은 준비뿐이다.
감문전 칼럼니스트 art@kmjourna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