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AI 정책의 핵심, 파운데이션 모델과 버티컬 AI의 ‘투트랙 전략’
"모든 식당이 직접 육수를 끓일 필요는 없다. 하지만 좋은 육수를 쓰는 것이 요리의 품질을 결정한다."
하정우 신임 AI미래기획수석이 평소 업계 지인들에게 전해온 ‘육수론’은 단순한 비유를 넘어, 한국 AI 산업의 전략 방향과 직결된 메시지를 담고 있다.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이 거대한 자본을 앞세워 GPT·Gemini·Claude 같은 거대 언어 모델(LLM)을 개발하는 동안, 한국은 어떤 전략으로 AI 주권을 지킬 것인가?
하 수석은 그 해답을 “잘 만든 육수(파운데이션 모델)를 오픈소스로 공유하고, 이를 바탕으로 각 분야에 특화된 요리를 내는 것(버티컬 AI)”이라 본다.
이는 네이버가 강조해온 ‘소버린 AI(Sovereign AI)’ 개념과도 궤를 같이 한다. 단순히 외산 모델을 가져다 쓰는 것이 아닌, 민관이 협력하여 주권 있는 기술을 보유하고, 오픈소스로 공유함으로써 자생적 생태계를 구축하자는 주장이다.
오픈소스 모델은 양날의 검
최근 메타의 라마(LLaMA), 유럽의 미스트랄(Mistral), 미국 일론 머스크 xAI의 그록(Grok) 등 글로벌 오픈소스 모델의 공개가 이어지면서, 국내 개발사들은 적은 투자로도 고성능 모델을 빠르게 활용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하지만 이는 ‘독이 든 성배’일 수도 있다. 기술 종속은 곧 산업 종속으로 이어질 수 있으며, AI의 원천기술을 확보하지 못한 나라는 결국 플랫폼 종속 국가가 된다.
LG AI연구원의 배경훈 원장은 “파운데이션 모델은 반도체·자동차와 같은 국가 전략자산”이라고 강조하며, 자력 모델 개발의 중요성을 피력한 바 있다. 이 문제는 기술 차원을 넘어, 데이터 주권과 국가 안보, 산업 구조 전반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정부가 말하는 AI 생태계 2.0 : ‘육수는 정부가, 요리는 민간이’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18일 국정기획위원회에 제출한 보고에서 새로운 AI 정책 방향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우선, AI 정책 전담 부처를 신설하고 그 안에 AI 정책실을 구성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이는 기존의 과기정통부에서 한 단계 나아가, 범국가적 차원의 통합 AI 전략을 수립할 수 있는 전담 조직을 별도로 두겠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동시에 국가AI위원회의 컨트롤타워 기능도 강화하여 정책 기획과 집행의 일관성을 높인다는 계획이다.
정부는 범용 AI 모델을 국가 차원에서 직접 개발하고, 이를 오픈소스로 공개할 방침이다. 특정 기업에 의존하기보다는 공공 중심의 인공지능 인프라를 구축함으로써, 다양한 민간 기업들이 이를 기반으로 특화 AI를 개발할 수 있도록 유도하겠다는 전략이다.
이와 함께, 정부는 고성능 GPU 자원을 파운데이션 모델 개발 기업에 우선적으로 배정할 예정이다. 동시에 외국산 GPU에 의존하지 않기 위한 중장기 전략으로, 국내 기술 기반의 신경망처리장치(NPU) 중심 AI 반도체 생태계도 육성할 계획이다.
아울러 교육, 의료, 국방 등 실제 산업 도입이 절실한 분야에서 버티컬 AI(특화형 AI) 기업들이 성장할 수 있도록, 각종 데이터 규제를 완화하고 실증환경을 조성할 방침이다.
R&D와 정책의 균형이 필요한 시점
정부는 최근 AI 및 과학기술 분야 전반에 대한 정책 정비 과정에서, 2024년 대규모 연구개발(R&D) 예산 삭감으로 훼손된 연구 생태계를 복원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먼저 국가 총지출 대비 R&D 예산 비중을 5%까지 확대할 계획이다. 동시에 연구 다양성과 학문적 자율성을 확보하기 위한 기초연구 과제 수도 1만 5천 건 수준으로 복원할 방침이다. 이와 더불어 박사 후 연구원 지원, 대학원생 연구생활 장려금 등 연구자의 성장 주기별 맞춤형 지원도 강화될 전망이다.
또한 여성 과학자 및 고경력 석학 등 잠재력 있는 인재 풀을 최대한 활용하고, 지역 거점 국립대학을 연구 중심 대학으로 육성하기 위한 제도적 보완도 마련 중이다.
“AI 주권”은 선택이 아닌 생존
‘육수론’은 더 이상 단순한 은유가 아니다. 글로벌 기술 패권 경쟁 속에서 생존하기 위한 한국형 AI 전략의 핵심 프레임이자, 정부와 산업계가 공동으로 책임져야 할 명제다.
AI 정책은 특정 기술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이는 곧 데이터 주권, 산업 경쟁력, 국민의 삶과 직결되는 복합 정책이다. 정부는 기술의 기초가 되는 ‘육수’를 책임지고, 민간은 그 위에 차별화된 요리를 만들어내야 한다. 그렇게 마련된 AI 생태계만이, 글로벌 거대 생태계에 종속되지 않는 진정한 ‘소버린 AI’를 실현할 수 있을 것이다.
신주백 기자 jbshin@kmjourna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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