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이 아닌 감각으로 남겨야 할 것들

 

*이미지= K-헤리티지 아트전 반아호연(盤牙浩然)   *XR서비스 제작은 XROO를 통해서 진행  * 클릭 시 XR 전시로 이동
*이미지= K-헤리티지 아트전 반아호연(盤牙浩然)   *XR서비스 제작은 XROO를 통해서 진행  * 클릭 시 XR 전시로 이동

문화재를 지킨다는 건 단지 오래된 물건을 보존하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곧 우리의 기억, 감각, 그리고 정체성을 미래 세대에게 어떻게 전할 것인가에 대한 깊은 질문이다.

오랫동안 문화재는 박물관 유리장 속에 갇힌 유물로 존재해왔다. 하지만 이제 기술은 그 기억을 살아있는 경험으로 바꾸고 있다. 바로 XR(확장현실)이라는 새로운 도구를 통해서다.

최근 임명된 허민 신임 국가유산청장은 “AI나 확장현실(XR) 등의 기술을 통해 (국가유산을) 디지털로 영구 보존하는 방안을 강구하겠다”고 밝히며, 기술 기반 문화재 보존에 대한 새로운 기대를 불러일으켰다.

XR 업계와 문화예술계는 이 발언에 주목하고 있다. 그동안 축적된 기술력과 실제 사례들을 국가 차원의 정책과 접목시킬 수 있는 전환점이 드디어 왔기 때문이다.

문화재 보존은 흔히 ‘시간의 적’과의 싸움이라 불린다. 풍화, 훼손, 화재, 기후변화, 수많은 관람객의 발길은 문화유산을 조금씩 지워간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기술로 그 싸움의 조건을 바꿀 수 있다. 단순히 사진을 찍거나 3D로 복원하는 수준이 아니라, 공간 전체를 감각적으로 기억하고, 그 안에서 일어났던 사람들의 감정과 경험까지 함께 담아내는 것. 이것이 XR 아카이빙의 진정한 힘이다.

XR 기반 문화재 아카이빙은 다음 네 가지 측면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한다.

첫째, 기록의 몰입도

기존 문화재 기록이 정면 사진이나 수치 중심 도면에 머물렀다면, XR은 그 공간에 직접 들어가는 경험을 제공한다. 창호를 통해 비치는 햇살, 처마 아래 드리운 곡선, 마루 끝에서 들리는 바람의 소리까지 – 이제 문화재는 단순한 시청각 정보를 넘어 시간과 감각이 응축된 경험으로 남는다.

둘째, 접근성의 민주화

한옥 고택이나 지방의 문화재 유적지를 직접 찾기 어려운 이들도 XR을 통해 언제 어디서든 접속 가능한 감상이 가능해진다. 특히 초등학교부터 대학까지 교육현장에서 XR은 최고의 살아있는 교과서가 된다. 교과서 한 페이지보다, 직접 걸어보고 둘러보는 체험은 훨씬 오래 기억되고, 감정적으로 연결된다.

셋째, 창의적 재활용

문화재는 더 이상 보존만의 대상이 아니다. 현대 예술과 XR이 만나면 창작의 무대가 된다. 영화, 게임, 전시, 공연, 메타버스 콘텐츠 등으로 확장될 수 있다. 문화재는 과거만 말하지 않는다. 지금 이 시대와 미래 세대에게 말을 거는 존재가 될 수 있다.

넷째, K-콘텐츠로의 확산

전통 한옥의 미감, 한국 문화유산의 정서와 철학은 이미 전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다. 여기에 XR 기술이 결합되면, 언어와 국경을 넘는 경험 중심 콘텐츠가 완성된다. 이는 K-드라마, K-팝을 잇는 다음 K-컬처의 중심축이 될 수 있다. 문화재의 디지털 수출은 이제 현실이다.

물론 과제도 있다. 디지털화 과정에서의 정밀성, 원형 훼손에 대한 윤리적 고민, 기술적 상상력과 역사적 고증 간의 균형 등은 반드시 풀어야 할 숙제다. 하지만 분명한 건,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문화재가 조용히, 그러나 확실하게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지금 아카이빙하지 않으면, 나중엔 ‘기억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순간이 올지도 모른다.

지원사업을 통해 제작된 수많은 전시도록이 활용되지 못하고 창고에 쌓여 먼지만 뒤덮이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문화재는 더 이상 감상하는 대상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 삶의 일부로 ‘경험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경험을 이어갈 도구가 바로 XR이다.

더 많은 문화재가 사라지기 전에, 더 많은 감각이 잊히기 전에, 우리는 XR이라는 기술로 우리 기억의 지층을 쌓아야 한다.

그 가능성은 이미 증명되었다. 작년 대전 소대헌·호연재 고택에서 열린 Korean Heritage Art Exhibition은 전통문화와 현대예술, XR기술이 만나 어떤 시너지를 낼 수 있는지 보여준 대표 사례다. 고택이라는 유서 깊은 공간 안에 25인의 작가가 참여해 공예, 회화, 조각 등 총 64점의 작품을 전시했고, 이 모든 것이 XR로 아카이빙되어 언제든 감상할 수 있게 되었다. (제작은 XROO에서 진행) 전시가 끝나도 경험은 계속된다. 관람객은 여전히 기와 아래를 거닐고, 작품과 마주하며, 고택의 공기를 온라인에서 그대로 느낄 수 있다. 

기억은 희미해지지만, 감각은 되살릴 수 있다. XR이 지키는 것은 단지 문화재가 아니라, 그 문화재 안에서 우리가 느꼈던 세계 그 자체다.

신승호 KMJ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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