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로남불이 아닌 변화의 필연성, 맥루한이 남긴 시대적 통찰
예전에 한 조직에서 리더로 있을 때의 일이다. 프로젝트를 진행하다 보면,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A 방향으로 가자”고 했는데, 이튿날 아침에는 “B로 바꿔야겠다”고 말할 때가 있다. 그러면 직원들 가운데 몇 명은 얼굴에 불만이 드러난다. “왜 자꾸 말을 바꾸냐, 일관성이 없다”는 속마음이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는 리더가 변덕을 부려서가 아니라, 일이라는 것이 본래 생물처럼 끊임없이 변하기 때문이다. 맥락이 바뀌면 지시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흔히 이런 상황을 두고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는 말을 한다. 많은 사람들은 이를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식 자기합리화로 치부한다. 하지만 일을 해본 사람은 안다. 그때는 정말 맞았고, 지금은 정말 틀릴 수 있기 때문이다. 시장 상황, 조직의 자원, 외부 변수들이 바뀌면, 어제의 올바른 판단이 오늘의 잘못된 선택이 되기도 한다. 정치권에서는 이 표현이 종종 비난의 도구로 쓰이지만, 사실은 맥락을 무시한 오해에서 비롯된 경우가 많다. 결국 중요한 건 ‘일관성’이 아니라 ‘맥락을 읽는 능력’이다.
이 지점은 마셜 맥루한(Marshall McLuhan)의 통찰과 맞닿아 있다. “미디어는 메시지다(The medium is the message)”라는 그의 명제는 어떤 내용이든 맥락에 따라 성격이 달라진다는 뜻이다. 손글씨 편지는 정성의 맥락을, 이메일은 신속과 효율의 맥락을 담는다. 동일한 말도 매체가 바뀌면 전혀 다른 의미로 읽히는 이유다.
오늘날 직장인들의 소통 환경은 더 다층적이다. 숏폼은 잠깐의 리프레시를 주고, 검색은 논리적 사고를 자극한다. AI 역시 맥락에 따라 달라진다. 단순 요약에 쓰면 ‘정보를 정리하는 비서’가 되지만, 아이디어 발굴에 활용하면 ‘함께 사고하는 동료’가 된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맥락을 무시하면, AI의 답변이 오히려 논란을 키울 수도 있다는 점이다. 최근 뜨거운 화두인 AI 윤리 역시 결국은 맥락을 어떻게 설계하고 관리하느냐의 문제다.
문화의 현장에서도 맥락은 힘을 발휘한다. MZ세대가 워라밸을 중시하는 것도, 단순히 일하기 싫다는 뜻이 아니라 삶 전체의 맥락에서 균형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밈(meme) 문화도 같은 이미지가 플랫폼과 상황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로 소비된다. 하이브리드 워크 환경에서는 온라인 대화와 오프라인 회의가 서로 다른 맥락을 만들어 메시지의 무게감도 달라진다.
그래서 콘텐츠를 설계할 때는 ‘무엇을 말할까’보다 ‘어떤 맥락에서 어떻게 전달할까’를 먼저 고민해야 한다. 동일한 보고서라도 프레젠테이션은 시각적 설득을 강화하고, 메신저 요약은 속도와 간결함을 메시지로 만든다.
특히 한국처럼 고맥락 말 문화에서는 불필요한 에너지를 소모하는 경우가 많다. 상사가 보낸 카톡에 그저 ‘Yes’를 전달하기 위해서도 ‘넵’ ‘네’ ‘예’ ‘넵!’ ‘네~’ ‘네ㅎㅎ’ ‘네ㅋ’ 가운데 무엇이 적절할지 초 단위로 결단해야 한다. 경솔해 보일까, 건방져 보일까, 혹은 지나치게 딱딱해 보일까 망설이며 메시지를 썼다 지웠다 반복한다. 우리는 이렇게 자잘한 감정까지 신경 쓰는 섬세함을 장착하고 오늘을 살아간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디지털이 대체하지 못하는 영역이 드러난다. 디지털 소통은 편리하지만, 정성과 연결의 밀도를 만들기는 어렵다. 대면 회의에서의 눈빛, 목소리의 억양, 악수의 힘은 이메일 열 통보다 더 큰 신뢰를 남긴다. 사회학자 랜달 콜린스가 말한 ‘상호작용 의례(interaction ritual)’처럼, 물리적 접촉과 정서적 교류가 조직의 에너지를 만든다. 그렇기에 오프라인 경험은 더 섬세하게 다듬어야 한다.
결국 일을 한다는 것은 맥락과 함께 움직인다는 뜻이다. ‘전후’라는 시간의 맥락, ‘좌우’라는 관계의 맥락을 읽어내야 한다. 어제의 지시가 오늘은 바뀔 수 있고, 같은 메시지라도 다른 매체에서는 전혀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
맥루한의 말을 직장에 적용하면 이렇다. 우리는 보고서를 쓰든, 발표를 하든, 메신저로 답변을 남기든, 이미 그 순간 매체와 맥락을 선택한 것이다. 차이는 그것을 의식적으로 설계하느냐, 아니면 무심히 흘려보내느냐뿐이다.
일에서 성공하는 사람은 단순히 말 잘하는 사람이 아니다. 어떤 상황에서 어떤 매체를 쓰면 효과적인지 감각적으로 읽어내는 사람이다. 결국 소통이란 텍스트의 문제가 아니라 맥락의 문제다.
신승호 KMJ 발행인
일喜일悲 _ 누구나 일을 하며 기쁠 때와 슬플 때가 있다. 다양한 성장 경험 속에서 진화 중인 우리 시대 스마트워커를 위한 나침반이 되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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