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그룹이 앞으로 5년 동안 국내에 450조원을 투자하겠다고 밝히면서, 한국 산업이 AI 중심 구조로 재편되는 거대한 변곡점에 들어섰다. 이번 발표는 단순한 시설 확대가 아니라, 국내 빅테크 중에서 유일하게 반도체, 배터리, 디스플레이, 클라우드 인프라까지 아우르는 ‘전주기 전략’을 본격 가동하겠다는 신호로 해석된다.
평택 5공장 착공…삼성이 AI 시대에 택한 ‘초격차의 원점’
삼성전자가 평택캠퍼스 2단지 5라인 건설을 시작하며 2028년 가동을 목표로 하는 초대형 제조 인프라 확장에 돌입했다. 메모리 중심의 구조가 한계에 이르렀다는 시장의 비판 속에서도 삼성은 ‘HBM·CXL·AI 서버 메모리’라는 AI형 메모리 구조로 전환을 가속하며, 반도체 경쟁력을 메모리에서 AI로 확장하겠다는 전략을 명확히 드러냈다.
TSMC와 SK하이닉스가 AI 패키징과 HBM으로 경쟁 구도를 강화하는 가운데, 삼성의 초대형 인프라 증설은 AI 데이터센터 수요 폭발기(2027~2030)를 정면으로 겨냥한다. 이는 메모리의 단순 가격 사이클이 아닌, AI 인프라 공급권을 확보하기 위한 선제적 투자로 평가된다.
전남 AI 데이터센터…삼성SDS는 ‘AI 인프라 기업’으로 재정의된다
삼성SDS가 전남에 대규모 AI 데이터센터를 구축하고 2028년까지 GPU 1.5만 장을 확보하겠다는 계획은 국내 빅테크 중 가장 ‘하드웨어에 무게를 둔 AI 전략’으로 꼽힌다.
네이버·카카오는 자체 AI 모델과 서비스 중심의 전략을 구사하지만, 삼성SDS는 컴퓨팅 파워를 국가 단위로 제공하는 ‘AI 인프라 베이스 캠프’에 가까운 역할을 맡았다. 특히 국내 스타트업과 중소기업이 겪는 GPU 자원 부족 문제는 산업 전반의 혁신 속도를 저해하는 병목으로 꼽혀왔는데, SDS의 개방형 모델은 국내 AI 생태계 전체를 끌어올리는 구조적 해법을 제시할 수 있을 것으로 평가된다.
삼성이 AI 시대를 맞아 B2C 중심의 스마트폰 전략보다, B2B·클라우드·데이터센터 중심의 산업형 AI 전략을 택했다는 점은 향후 국내 빅테크 구도를 크게 바꿀 변수다.
플랙트 생산라인의 신호…삼성이 노린 것은 ‘데이터센터 냉각 패권’
삼성전자가 인수한 유럽 최대 공조기업 플랙트(PHLECT)의 한국 생산라인 후보지로 광주가 검토되고 있다는 사실은 단순한 공조사업 확장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AI 데이터센터는 전력·냉각이 전체 운영비의 절반을 차지하는 분야로, 냉각 기술이 곧 AI 경쟁력이다. 그런데 반도체·메모리·GPU·서버 기술을 모두 보유한 기업 중 데이터센터 공조 기술까지 직접 확보한 기업은 삼성 외에 찾기 힘들다.
삼성 입장에서 공조 기술 내재화는 ▲AI 반도체 생산 ▲AI 서버 공급 ▲AI 데이터센터 기술 ▲AI 클라우드 인프라까지 이어지는 ‘엔드투엔드 AI 수직계열화’를 완성하는 퍼즐이다.
울산 전고체 배터리…삼성SDI는 ‘전기차 배터리 2막’을 연다
삼성SDI의 울산 전고체 배터리 추진은 국내 배터리 3사 경쟁 구도에 중요한 변화 신호로 받아들여진다. 지금까지 배터리 시장은 NCM(삼원계, 고가)·LFP(인산철, 저가) 경쟁 중심이었고, LG엔솔과 CATL이 시장을 주도했다. 그러나 전고체는 기존 배터리 체계를 완전히 바꿀 수 있는 기술로, 성공 시 시장 지형을 뒤집을 수 있는 초격차 후보 기술이다.
전고체 배터리 상용화는 도요타, 퀀텀스케이프 등 글로벌 선도 기업이 기술 발표만 반복해온 분야이지만, 실제 생산 거점 구축을 공식화한 것은 삼성SDI가 드문 사례다. 울산 거점이 현실화되면 SDI는 ‘보수적이지만 완성도 높은 기술’이라는 시장 평가를 ‘차세대 전기차의 주도권’으로 전환할 계기를 확보한다.
8.6세대 IT OLED…삼성디스플레이는 ‘탈스마트폰’ 전략으로 간다
삼성디스플레이는 충남 아산의 8.6세대 OLED 라인을 본격화하며 대형 IT 패널 시장 선점에 나섰다. 내년 중순 양산될 이 라인은 애플의 OLED 맥북·아이패드 수요 증가와 맞물리며, 중국 디스플레이 기업의 추격 속에서 프리미엄 IT 시장을 방어하는 삼성의 핵심 무기다.
중국 패널업체들이 TV·중저가 OLED 시장을 매섭게 파고드는 가운데, 삼성은 고부가 IT 시장에 집중해 ‘첨단 IT 디스플레이=삼성’이라는 이미지를 더욱 공고히 하고 있다. 이는 스마트폰 수요 둔화 속에서 사업 포트폴리오 안정성을 높이기 위한 전략적 선택으로 보인다.
부산 패키지기판·협력사 금융지원…삼성은 생태계 전체를 끌어올린다
삼성전기가 강화하고 있는 부산의 서버용 패키지기판 라인은 AI 시대 패키징 전쟁의 최전선에 있다. GPU·HBM 등 고성능 AI 칩 패키징 수요가 늘어나면서 기판 기술은 새로운 ‘반도체 병목’으로 떠올랐고, 한국의 기판 기술력이 글로벌 패권 경쟁에서 중요해지는 시기다.
여기에 협력사 1051곳에 2조원 규모의 저리 대출을 제공하는 삼성의 프로그램은 AI·반도체 생태계가 한 기업의 기술력만으로는 유지될 수 없다는 현실을 반영한다. 삼성은 생태계 전체를 끌어올리는 방식으로 글로벌 경쟁력을 확보하려는 한국형 빅테크 전략을 선택한 셈이다.
삼성의 450조 투자는 ‘한국형 빅테크 모델’의 시작이다
삼성의 이번 초대형 투자는 ▲AI 반도체(HBM, D램), 삼성전자 ▲AI 서버용 패키지기판, 삼성전기 ▲AI 데이터센터 인프라, 삼성SDS ▲냉각(공조)까지 확보(플랙트) 미래 동력(전고체 배터리), 삼성SDI ▲고사양 디스플레이, 삼성디스플레이가 맡아, 기획–개발–생산–패키징–인프라–서비스까지 전 과정을 삼성이 직접 수행하는 산업의 전주기를 책임지는 전략(End-to-End)이다.
여기에 협력사 생태계까지 연결되는 국가 단위의 기술 투자 전략이라는 점에서 국내 빅테크 중 가장 확장된 산업 스케일을 보여준다.
이번 450조 베팅은 삼성이 AI 시대 ‘AI 인프라의 시작부터 끝까지 책임지는 기업’으로 변모하려는 결정적 신호다.
신주백 기자 jbshin@kmjourna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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