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러티브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④비트코인

몰입을 만들어 내는 서사의 힘을 해부합니다.

 

이미지=SORA생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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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숫자에 열광하는가.” 스스로에게 자주 던지는 질문이다. 요즘 많은 사람들이  365일 24시간, 단 한 순간도 멈추지 않는 차트를 들여다보며 하루를 시작하고 끝낸다.

도파민 중독이라고 해도 좋다. 초 단위로 올라가는 빨간 숫자, 갑자기 툭 떨어지는 파란 선. 모든 희망과 절망이 그 그래프 위에서 춤을 춘다. 어느새 이 시대의 감정 곡선은, 코인 차트의 진폭을 닮아가고 있다.

극단적 롤러코스터의 행보. 계층 이동의 사다리가 끊긴 사회에서, 이제 더는 성실함이나 근속 연수가 보상을 보장해주지 않는 시대에서 비트코인은 그 자체로 하나의 탈출구가 되었다.

‘나도 한 방에 갈 수 있다’는 믿음, ‘지금은 아무것도 없지만 언젠가는’이라는 기대. 그 감정의 이름이 비트코인이라는 코드 조각에 투사된 것이다.

단순한 투기라고 치부하기엔 너무 많은 서사가 얽혀 있다. 비트코인은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하나의 내러티브다. 그리고 내러티브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비트코인이라는 신화의 재림은 그렇게 진행중이다.

화폐는 언제나 인간이 만든 가장 정직한 상징이었다. 잉여노동을 저장하고 교환하려는 욕망은 소금, 곡식, 조개껍데기, 금 등으로 나타났다. 그것은 손에 잡히고, 무게가 있었으며, 나의 시간을 증명해주는 물질이었다.

하지만 인간은 편의를 사랑한다. 무거운 금을 대신해 종이를 만들었고, 종이 대신 숫자를 만들었다. 이제는 스마트폰 하나로 커피를 사고, 송금을 하고, 해외주식에 투자한다.

그 숫자에는 국가와 권력이라는 인장이 찍혀 있었다. 그러나 비트코인은 그 믿음의 구조를 정면으로 부정했다. 국가도, 보증도, 중앙은행도 없다. 오직 컴퓨팅과 시간, 디지털 노동만이 그 존재를 보증한다.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고,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는 비트코인은 어쩌면 이 시대의 가장 솔직한 화폐다.

인플레이션은 신뢰를 깎아 먹는다. 오늘의 1,000원이 내일은 900원이 되는 시대. 사람들은 종이에 찍힌 숫자보다, 코드 위에 새겨진 신념을 더 믿기 시작했다. 비트코인은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나는 줄지 않는다. 나는 영원하다. 나는 네 시간의 증거다.”

그 말은 너무나 원초적인 감정을 건드린다. 절대 발행량, 수학이 보장한 신뢰, 누구도 위조할 수 없는 블록체인의 구조. 사람들은 그것을 ‘디지털 금’이라 불렀고, 그 가치는 국경도, 정부도, 은행도 통과하지 않았다. 어느새 코인은 신념이 되었고, 신념은 종교가 되었다.

하지만 모든 종교는, 언제나 시험을 받는다.

“못 풀 수 없는 암호는 없다.”

절대 풀 수 없다는 암호화폐 앞에 양자컴퓨팅이라는 새로운 기술이 등장했다. 

모순, 창 모(矛)'와 '방패 순(盾).

비트코인의 절대 신뢰에도 첫 번째 흠집이 생겼다. 언제일지는 그 누구도 알 수 없지만, ‘절대 안전하다’는 내러티브에 대해 처음으로 Tech관점의 질문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역사는 이런 흐름을 반복해왔다. 로마제국은 데나리우스 은화로 제국의 위엄을 상징했지만, 은의 순도가 낮아지며 사람들의 신뢰도 함께 줄어들었다. 프랑스의 존 로는 금 없이도 지폐를 발행할 수 있다는 믿음을 퍼뜨렸고, 그 신화는 버블과 함께 붕괴했다. 20세기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 지폐 한 다발로 빵 하나를 살 수 없던 시대, 그 붕괴의 시작도 화폐에 대한 신뢰가 무너졌기 때문이었다.

비트코인은 아직 무너지지 않았다. 쉽게 무너지기도 어려워 보인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이 기술 위에 세워진 신화라는 사실을 또렷이 인식하고 있다.

코인은 감정이다. 욕망이고 불안이고 탈출의 희망이다. 기술은 그 감정을 수학으로 감싸줄 뿐이다. 그리고 그 구조는, 누군가의 ‘믿음’에 의해 작동한다.

우리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야 한다.내러티브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그 안에는 인간이 진짜 원하는 것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인정받고 싶고, 자유롭고 싶고, 잃고 싶지 않은 그 무엇. 비트코인은 그런 욕망을 가장 정직하게 반영한 21세기의 신화다.

결국, 우리가 진짜로 믿고 싶은 건

내 삶의 무게가 가볍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그 마음을 담은 서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지금도 쓰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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